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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인물

커티스 르메이 Curtis LeMay

 

 

커티스 르메이 (Curtis Emerson LeMay. November 15, 1906 – October 1, 1990)

 

 

 


별명 : "Old Iron Pants", "The Demon", "Bombs Away" LeMay, the "Big Cigar"


명언

 

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 It is their government and you are fighting a people, you are not trying to fight an armed force anymore. So it doesn't bother me so much to be killing the so-called innocent bystanders.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당신은 그들의 정부와 함께 싸우는 민중이며, 더 이상 무장한 군인하고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소위 말하는 죄없는 방관자들을 죽인다고 신경쓰지 않는다.

 

- 도쿄대공습 당시

 

 

I'll tell you what war is about. You've got to kill people and when you kill enough of them, they stop fighting.
전쟁이라는 것이 뭔지 너에게 말해주마. 네가 할 일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고 그들을 충분히 죽였으면, 싸움을 멈추는 것이지.

 

- 새뮤얼 코헨(중성자탄 W70 탄두 개발자)에게

 

 

We should bomb Vietnam back into the stone age.
우리는 베트남을 폭격해서 석기 시대로 돌려놓아야 한다.

 

- 베트남전 당시

 

 

"They want to go back and reject modernity. Well, I think we should help them. We ought to bomb them back to the Stone Age."

그들(ISIS)이 현재를 버리고 과거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내 생각에 우리는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폭격해서 석기시대로 되돌려줘야 합니다.

 

 

"In Japan they would be set up like this: they’d have a factory; and then the families, in their homes throughout the area, would manufacture small parts. You might call it a home-folks assembly line deal. The Suzuki clan would manufacture bolt 64; the Harunobo family next door might be making nut 64, 65, or 63, or all the gaskets in between. These would be manufactured right in the same neighborhood. Then Mr. Kitagawa from the factory would scoot around with his cart and pick up the parts in proper order."

 

 

1906년 11월 5일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 태어났다. 미국 공군 장성으로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장에서 저고도 전략 폭격으로 일본을 초토화시킨 것으로 유명.
4세 때 처음으로 비행기를 보고 비행에 대한 환상을 폼어 중학생 때 친구와 돈을 모아서 5분 동안 하늘을 날아본 뒤 개인 비행기를 사고 싶어했다고 한다.

커티스는 제2차 세계대전, 6.25전쟁, 베트남전 등에서 "석기시대로 만들겠다"는 발언을 자주했다. 

 

 

 

 

 

2차 대전 당시

 

육군항공대 중령으로 B-17로 구성된 제8공군 지휘관 중 한명이었다. 이 당시 커티스 르메이는 과로로 구안괘사가 와서 오른쪽 얼굴이 굳어졌다.


1942년 제305 폭격 부대를 조직, 훈련시키고, 유럽에서 전투 부대를 지도했다. 유럽 작전에서 B17 폭격 부대에 의한 포메이션과 폭격 기술을 개량한다. 미국 공군 공식 사이트에 의하면 이런 기본적인 절차와 기술은 훗날 태평양에서 활약하는 B29에 적용됐다. 1942년 9월부터 1943년 5월까지 영국에서 제8폭격 군단 산하에 항공군 대령으로 부대를 지휘했고, 훗날 제4폭격 항공단을 이끌고 1943년 9월 독일 레겐스부르크 폭격 공적으로 준장으로 승진, 1944년 3월에는 소장이 됐다.

 

독일 본토 폭격에 나가는 승무원을 향해 "네가 폭탄을 투하해서 심적으로 괴롭다면, 분명 침대에 자다가 몇 톤의 파편에 맞은 아이, 온몸이 불길에 휩싸여 "엄마, 엄마"하며 우는 세살 소녀의 슬픈 시선을 한순간 떠올린 것이 틀림없어. 제정신을 유지한 채 나라가 네게 원하는 임무를 완수하려면, 그런 것은 잊어"라는 말을 남기기도.

 

로버트 맥나마라는 이렇게 적고 있다.
<지휘관 중 1명으로 커티스 르메이라는 B-24 부대를 지휘하는 대령이 있었다. 그는 내가 전시 중 만난 사람 중 가장 뛰어난 전투 지휘관이다. 그러나 그는 비정상적으로 호전적이며 많은 사람들이 잔인하다고만 생각했다. 르메이는 보고서를 받은 후 명령을 내렸다. "앞으로 모든 임무에서 내가 선두 폭격기에 탑승한다. 앞으로 출격한 모든 폭격기는 공격 목표까지 도달한다. 이것을 지키지 않는 자는 모두 군법 회의에 회부 처분한다." 임무 중지 율은 순식간에 떨어졌다. 그는 그런 종류의 지휘관이었다>

 

커티스 르메이의 활약은 역시 대일전쟁에서 두드러진다. 하치만 제철소 폭격하고, 정밀 폭격 기술 개량에 주력했으며 비행기 공장을 목표로 한 낮은 정밀 폭격으로 성과를 올렸다. 제21폭격 집단 사령관 헤이우드 한셀의 정확도가 14%였던 반면 르메이는 41%의 정밀도로 목표 300m 이내 정밀 투하를 했다.
제20공군 휘하인 제21 폭격 집단 사령관에 부임. 아놀드는 중국에서의 폭격을 그만두고 르메이를 마리아나에 합류시켜 1945년 1월 20일 그를 사령관에 임명했다.

 

3월 10일에는 역사적인 도쿄 대공습을 지휘. 기존은 고도 8500m~9500m의 주간 폭격이지만, 르메이는 고도 1500m~3000m로 변경했다. 또한 기관총, 탄약을 B29에서 제거한고  당연히 저공인만큼 적의 요격을 염려해서 야간에 폭격했다. 1대당 폭탄을 200km 늘렸으며 편대가 아닌 단기 직렬로 변경했다. 승무원들은 두려워했지만 결과적으로 B29의 피해는 미미했다. 불과 3시간도 안되는 사이에 일본은 행방불명 10만명, 이재민 100만명 이상 그리고 약 6평방 마일에서 25만 가옥이 소실됐지만 르메이 부대는 325댜 중 14대를 손실했을 뿐이다. 이에 아놀드는 3월 10일 "축하합니다. 이 임무에서 당신의 부하는 어떤 일이라도 해낼 배짱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라고 메세지를 보내며 "공군은 태평양 전쟁에 큰 기여를 해낼 수 있는 기회를 손에 넣었다"며 찬사를 보냈다.
이 초토화 작전은 도쿄와 오사카, 나고야 등의 대도시는 물론 도야마시 등의 지방 중소 도시까지 대상이 됐다. 이 공습은 일본 국민을 떨게 해서 일본 측에서 그는 [귀축 르메이] [몰살의 르메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전후 르메이는 일본 폭격에 도덕적인 고민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당시 일본인을 죽이는 것에 대해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내가 고민했던 것은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만약 전쟁에 패했다면 나는 전범으로 재판 받았을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승자가 됐다" "대답은 YES다. 군인은 누구나 자신의 행위의 도덕적 측면을 약간은 생각한다. 그러나 전쟁이란 원래 모든 도덕에 반하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1945 년 8 월 15 일 종전. 9 월 20 일 기자 회견에서 르메이는 "전쟁은 소련의 참전이 없었어도 원폭없이 2 주 이내에 끝났을 것입니다. 원폭 투하는 전쟁 종결과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일본인들도 원폭보다는 도쿄 대공습이 종전에 더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말년의 1988 년 저서에서 그메이는 "원폭을 사용하지 않고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고 해도, 나는 원폭 투하는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원폭 투하가 항복 협상을 앞당겼으니까."라고 말하며, 원폭 투하는 상륙 작전 전에 일본을 항복시키고 백만 미군의 목숨을 구했다는 미국 정부의 공식 설명을 지지했다.

종전 후 르메이는 홋카이도에서 시카고까지 논스톱 기록으로 B29를 조종하고 귀국했다.

 

 

 

 

 

냉전시대

 

전후 항공 자재 군단 사령부 본부에 부임. 국방부에 초대 받아 연구 개발 항공 부 참모장을 맡는다. 폭격기 개발 책임자로서 발키리 계획을 지휘 당시 주력기인 보잉 B-52 폭격기와 세계 최초 초음속 폭격기인 컨베이어 B-58 폭격기의 후계기가 되는 초음속 폭격기의 개발을 지휘한다.


1947년 10월 독일 비스 바덴에 있는 미군 항공 유럽 본부의 지회관을 명령 받았다. 베를린 봉쇄에 대항하는 공중 가교 작전에 종사, 1948년 네브라스카 Offutt 공군 기지 본부를 설립했다. 1949년부터 1957년까지 SAC(전략 항공 군단) 사령관을 역임했다. 한국전쟁에서도 큰 역할을 했는데, 이 때 르메이는 "우리는 조선 북쪽에서 남쪽까지 모든 도시를 태웠다. 우리는 100만명 이상의 민간인을 죽이고 수백만명 이상을 집에서 내쫓았다"고 말했다.

1957년 7월 공군부 참모장을 지냈다. 1957 년 11월 11일 KC-135 에 의한 무급유 연속 비행 세계 기록 수립을 지휘하고 그 해 우수한 조종사에게 주어지는 하몬 트로피를 수상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쿠바 공습을 존 F 케네디에게 제안했다 거절 당했다.

 

일본에 큰 피해를 입혔음에도 1964년 12월 7일에 이루마 기지에서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이유는 일본 항공 자위대 육성에 협력했기 때문. 당연히 수상에 비판도 많았다. 이에 사토는 "지금은 미국과 우호 관계고 공적이 있다면 과거는 과거일 뿐, 공에 보답하는 것이 당연하다. 대국의 백성은 언제까지나 얽매이지 않고 미래의 관계, 공적을 생각하고 행동해 나가야 한다"고 대답한다. 후에 [NHK 특집 도쿄 대공습]에서 취재한 전쟁 책임에 대한 물음에 르메이는 그 훈장을 보여줬다.

 

베트남전에서 공군 참모 총장을 지내며 "(북)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되돌려 주겠다"고 호언했다.

 

 

커티스 르메이와 조지 월리스

 


1965년 2월에 마침내 퇴역. 1968년에는 베트남전을 추진, 인종 차별 정책을 내건 조지 월러스 대통령 후보와 함께 미국 독립당(American Independent Part)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해지만 낙선했다.

1970년 12월 14일 티니안의 복지 생활 향상에 뛰어난 공적으로 티니안 섬에서 표창장을 수상했다.

1990년 10월 1일 캘리포니아 주 마치 공군 기지에서 사망했다.